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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21세기 목회

1. 미래목회의 새 패러다임

미래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미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갖고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래는 창조적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엔 절망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미래의 사회는 한마디로 인류 역사의 큰 변동이 가속화되는 사회이다. 어느 한 분야만이 아닌 총체적인 변화가 한꺼번에 몰아 닥치게 될 것이다.

미래 학자들의 예측을 종합해 보면, 다음의 현상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변화의 초고속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듯이, 앞으로 이런 급변화는 더욱 가중될 것이고 그 여파도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앨빈 토플러는 이와 같은 변화의 충격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상실시키고, 적응력을 붕괴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을 왜소화시켜 문맹화 시키므로 더욱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고 진단했다.

변화 충격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인간들을 모두 환자로 만들고, 육체적 피곤과 리듬파괴는 물론 정신적인 영역도 뒤흔들어 놓게 될 것이다. 그 결과 현실로부터의 도피현상이 일어나서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둘째, 기술과 정보 산업의 혁명이다. 종전의 산업성장의 원동력은 토지와 자본과 천연자원이었지만 미래의 산업은 컴퓨터, 전자 자본재, 소프트웨어, 장거리 통신, 광섬유, 로봇, 세라믹스, 데이터 베이스, 정보 서비스, 유전공학들이 발달하게 되며, 특히 정보산업이 전 산업을 주도하는 새로운 산업형태가 발달하고 대기업과 소기업 사이의 네트워크, 그리고 컴퓨터의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신 산업을 주도할 두 가지 요소를 ‘컴퓨터’와 ‘로봇’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이 당분간은 세계의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컴퓨터의 발달은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사회의 변동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화된 정보통신 체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로봇과 같은 기술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역기능적인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와 ‘노동의 종말’을 가져왔다.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은 이제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고, 로봇이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냄으로 새로운 윤리적 과제를 낳게 했다.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 는 미래 사회를 다음과 같이 예측하였다.

1) 인위적 기술에서 하이테크로(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2) 국가 경제에서 세계경제로

3) 중앙 집권에서 지방 분권으로

4) 계급체제에서 네트워크 체제로(이른바 인터넷 시대)

5)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6) 단기 정책에서 장기 정책으로

7) 제도적 원조에서 자립체제로

8) 대여 민주주의에서 참여 민주주의로

9) 북부에서 남부로

10) 양자 택일에서 다종 선택으로

셋째, 통제불능의 혼돈시대이다. 대부분의 교육이나 정보유통은 멀티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댄 의사소통은 자연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접촉불가의 다중화 사회는 가정이나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파괴시키게 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여과되지 않는 정보는 오히려 정보의 황무지화를 낳을 가능성이 많다. 파올리니 박사는 강대국 중심의 문화식민지 구축으로 문화제국주의의 도래를 내다보면서 ‘자아정체성의 상실’을 우려했다. 또한 스티븐슨은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획일화 문화로 단조로운 유니폼시대가 오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임길진 교수는 미래사회의 문제로 정보절도, 정보파괴, 컴퓨터 중독, 비정상적인 가정생활, 비인간화, 정보격차 등을 제기했고, 이어령 교수는 미래에는 얼굴 없는 문명이 지배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통제불능의 아나키 상태가 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러한 미래 사회 속에서 교회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첫째 미래형의 차세대 목회 전략 수립이 시급히 요청된다.

둘째 신사고적 목회 방법론이 필요하다.

셋째 사역의 전문성과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

넷째 평신도 중심의 리더십 체계를 활성화시켜 조직을 강화시켜야 한다.

다섯째 개인과 공동체를 위협하는 파괴문화에 대한 ‘대체 영성 강화’가 절실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2. 21세기 한국사회

지난 20세기,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 나라는 그 동안 성장과정의 철학을 ‘풍요’를 추구하는 데 역점을 두었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이 어느 수준에 오르자 물량에 의해 모든 가치를 부여하려는 잘못된 의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물량주의적 사회풍조는 앞으로도 한 동안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세계화’라는 또 하나의 과제 앞에서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밀착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치열한 생존경쟁을 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에 적응해야하는 우리의 환경은 ‘개발’과 ‘생산’이라는 두 바퀴에 의해 더욱 처참하게 짓밟힐 전망이고, 교육의 방향은 자아실현적 기능에서 인재등용 기능으로 전문화, 특수화를 꽤할 것이다. 또한 향락성의 레저 문화가 확산될 것이고 윤리는 더욱 타락할 것이며, 오늘과 같은 어느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정치, 사회, 교육, 종교 등 전 분야에서 타락의 조짐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3.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교회

현 우리 나라 대통령자문 기관인 ‘21세기위원회’에서는 조화를 통해 미래도전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성장과 분배의 조화, 개발과 보전의 조화, 개인과 사회의 조화, 국가와 세계의 조화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은 미래 설계의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1) 국민복지의 증대, 2) 형평성의 보장, 3) 다원성의 증대, 4) 내면적 완성의 추구, 5) 과학화와 창의성의 존중, 6) 절제와 공생의 생활화, 7) 세계시민의 지향, 8) 전통과 세계성의 조화, 9) 한반도의 통일과 균형발전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 과제 앞에 서있는 이 민족 앞에, 과연 한국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첫째, 총체적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미래는 일찍이 우리가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모습으로 전개 될 것이므로 우리의 미래 읽기는 낡은 방법의 고정관념으로는 어렵다. 이미 새 언어가 생성되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고, 신세대들의 미래문화권으로의 진입은 기성세대에 편승하지 않고 벌써 앞서가고 있다. 일체의 전통적 방법은 박물관에 갇힌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까지 말하던 자들이 이제는 듣는 자리에 서야하고, 지금까지 무기화 했던 지식도 이젠 겸허하게 무장해제 해야한다.

‘의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은, 새로운 미래를 수용하고 더불어 동참할 수 있는 기본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의 틀에서 과감하게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시했던 제도로부터 낡은 옷을 벗고 새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리더십이 창출되어야 한다. 역대상 12장에 보면,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들을 관할하는 자며” 라고 말하고 있다(대상 12:32).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흐름을 읽고 리더십을 발하는 자가 있다. 이른바 비전 있는 지도자이다.

비전 있는 지도자는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내일이 없는 오늘의 이해관계에만 골몰해 있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비전이 없는 지도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모든 공동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옛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옛것이란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들’이다. 교회와 민족을 분열케 했던 것, 정직과 성실을 외면하며 늘 기회주의적으로 관변에서만 서성댔던 지난 날, 사회를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외면했던 직무유기 등을 구체적으로 회개할 때에 교회의 순수성이 회복될 것이다. 새 술을 담기 위해서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롬 12:2. 마 9:16-27)

넷째, 교회경쟁력이 재고되어야 한다. 지금은 무한경쟁시대이다. 따라서 교회도 경쟁력을 재고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일꾼들의 역할이 분담되어야 한다. 한 사람에게, 또는 한 부서에 집중된 ‘모세’ 형의 구조를 여러 지도자에게 분담시키는 ‘이드로’ 형의 구조로 바꿔야 한다. 곧 전문화, 차별화가 필요하다.

교회의 각 부서마다 그 기능과 역할을 경쟁력 차원에서 관리하려면, 주먹구구식보다 분야마다 연구와 리서치, 진단과 분석을 통한 창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다섯째, 양에서 질로 돌아가야 한다. 유럽은 기독교 인구가 팽창되었던 시기에 아편을 수출했고 노예매매를 했으며 인권을 유린했다. 무력으로 타민족을 정복하여 식민지화했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착취를 일삼았다.

이와 같은 교회사의 교훈은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전체 인구의 25%를 상회하는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는 우리 나라의 뒷골목에서는 지금도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기독교의 힘은 양(量)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질(質)에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과감하게 미래적인 질적 문화창달에 투자해야 한다. 일꾼을 기르고 기독교문화를 진흥시켜 새로운 문화를 토착화 시켜야 한다.

여섯째, 전략적 선교정책으로 세계선교에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의 자원(시간, 재정, 인력)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지는 않았는지, 전문적으로 다시 재평가해야 한다. 그래서 보다 효율적으로 바르게 펼쳐갈 수 있는 선교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도시문화권을 중심으로 현지 지도자를 육성하여 파송하는 정책이 요청되며, 다양한 전문적 사역자의 양성도 시급하다.

일곱째, 민족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은 과거처럼 이데올로기의 대결구도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구속사적 시각에서 ‘사랑’과 ‘화해’로 선교의 도구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통일을 위해서 먼저 교회가 예비해야 할 우선 순위는 국가나 다른 단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양하고 동포의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 실천’의 방안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인격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해법을 찾! 아야 한다.

Ⅱ. 경쟁력을 갖춘 사역자

1970년, 8-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교회를 세우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모여들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산업 사회가 정착되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이제 영적인 관심사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한마디로 목회적 환경이 아주 좋지 않은 실정이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교회 안에 경쟁력을 가진 건강한 사역자들이 양성되어야 한다.

1. 누가 건강한 사역자인가?

다음은, 워렌 W. 위어스비가 제시한 ‘건강한 사역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좋은 지침이 될 것 같아 요약해서 정리해본다.

첫째, 사역의 기초는 ‘인격’이다. 목회의 성공과 실패는 인격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역을 준비하는 사람은 사역자로서의 능력과 함께 자신의 인격을 연마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나 경험, 명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어도 인격이 훌륭하지 못하면 그러한 것들은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이다.

인격적인 말과 행동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마음에서 비롯된다. 정직한 인격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산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한다.

둘째, 사역의 본질은 ‘섬김’이다. 예수님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친히 수건을 들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섬기셨으며,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지금도 우리를 섬기고 계신다.

셋째, 사역의 동기는 ‘사랑’이다. 사역자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단지 의무감 때문에 사역을 한다면 목회는 고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사역자의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역자의 사랑은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전인격적인 사랑이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마음은 항상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넷째, 사역의 척도는 ‘희생’이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사역에 따르는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사역을 통해서 이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역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때문에 사역자가 자신의 상처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다른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적절히 사역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상처를 입히고 고난 당하게 하며 희생당하게 할 수도 있다.

다섯째, 사역의 권위는 ‘순종’이다. 교회의 질서는 영적 권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한다. 순종은 단순히 종속되는 것이나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자발적으로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지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복종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으로 주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한다.

여섯째,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역의 목적이 자기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인지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오직 그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은 죄인을 지옥에서 구해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일곱째, 사역의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이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가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교회에서 늘 기도만 하고 성경은 보지 않는다면, 지식은 없고 열심만 있는 꼴이 되고 만다. 반대로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성경만 본다면 교회는 성경 학교에 불과할 것이다. 기도가 없는 성경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성경 지식이 없는 기도는 한쪽으로 치우친 영성을 갖게 한다. 말씀과 기도가 함께 있어야만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균형 ! 잡힌 교회로 세워나갈 수 있다. 모든 사역자는 항상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한다.

여덟째, 사역의 특권은 ‘성장’이다. 우리가 사역을 통해 얻게 되는 보상은 ‘성장’이다. 우리가 사역에 전심전력할 때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아가게 된다.

우리의 성장이 멈춰 버릴 때, 우리의 사역은 정체되고 와해되기까지 한다. 성장이 중단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것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사역자는 점차 자기 보호적이고 자기 방어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솔직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는 교인들은 비판자가 되거나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 사역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아홉째, 사역의 원동력은 ‘성령’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신자의 생활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열 번째, 사역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역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역은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닮아가는 과정이다. 신학자들이 ‘성화’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단순히 모방하는 것 이상이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 수 없고, 예수님이 섬기신 것처럼 섬길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을 따를 수 있다.

Ⅲ. 멀티미디어 시대와 열린 목회

G. 길더는, ‘미래는 TV 시대는 끝나고 컴퓨터 패러다임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른바 멀티미디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얘기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교회의 목회와 신학에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멀티미디어 기술이 가지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 데, ‘통합성’, ‘영상화’, ‘쌍방향성’이다. 주로 이성에 집중되었던 하나의 접근 방식에서 이제는 이성, 감성, 의지 등을 총괄하는 총체적 경험을 통한 접근 방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적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런 멀티미디어적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1. 변화되어야 할 교회

멀티미디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뛰어난 상상력(想像力)이다. 상상력이란 어떤 기존의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미국이 이런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주입식이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는 교육 덕분이다. 교회도 이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과거와 다른 변화를 이룩하지 않으면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어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전반적으로 경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신앙 내용을 가졌으면서도 상상력의 세계를 교리화하여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 것은 교회가 저들의 상상력과 활동력, 다양한 욕구들을 제한함으로서 그들의 삶이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예배와 지루한 설교, 변화 없는 프로그램, 교회 지도자들의 경직된 고정관념, 이런 것들이 오늘의 교회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동맥경화증에 걸린 교회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발전해가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부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들은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전략적인 목회 프로젝트가 개발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출애굽 사건 전후를 보면,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I am that I am)”라고 대답하셨을 뿐 긴 교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광야에서 만나를, 반석에서 물을,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면서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직접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 또한 다양했다. 적절한 비유를 통해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때로 이성과 감성 세계를 초월한 기적의 사건들을 통해 복음을 일깨우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비유, 기적, 치유, 가르침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섬김의 나라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다 마침내는 자신의 몸을 친히 십자가에 내어 주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알리셨다. 그리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친히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교육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었고,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것들이었을 뿐 아니라, 저들이 고수하여 온 율법주의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들이었다. 율법이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같다면,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대화가 가능한 총천연색 영화와 같다고 하겠다. 글자 속에 죽어 있던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내신 놀라운 방법이다.

3. 멀티미디어적 교회로 거듭남

이렇게 전파된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문자 속에 갇히게 되면서부터 교회는 다시금 형식화, 제도화, 교리화 되어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잃게 되었다. 물결치며 흐르는 강물과 같은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작은 그릇 속에 담겨진 물과 같이 흐름도 물결침도 없는 죽은 나라가 돼버린 것이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역동성을 잃은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오늘을 보라. 이런 개혁 운동을 무색하게 할만큼 다시금 교회들이 그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작은 왕국이 돼버렸고,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 오직 ‘교회’라는 조그마한 왕국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주고받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이웃으로, 세계로, 열방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회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옛날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상징과 음악과 다양한 영성 개발을 위한 좋은 사역도구들을 다 없애버리고 오직 ‘말씀 위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영성이 곤두박질하고 있다. 깨어 일어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깊이 잠들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예배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찬양 속에는 영감이 없으며 기도는 허공을 치고 있다. 영성을 깨우기는커녕 감성조차 자극하지 못하는 맥빠진 예배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멀티미디어 시대다. 싫든 좋든 교회는 멀티미디어적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좀더 역동적인 예배를 위해서 다양한 방법과 시도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멀티미디어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주신 우리 시대의 문화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 틀을 선용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젊은이들을 세상으로 내몰지 말고 그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영성을 일깨우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선용하여 역동적인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4. 역동적인 공동체

예수께서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고자’ 부르시고 훈련하셨다(막3:14). 이 부르심의 공동체, 훈련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셨다는 것이다. 선포하심으로서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심으로서 복음 안에 사람들을 세우시고, 치유하심으로서 그들을 온전케 하셨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제자훈련 과정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예수님의 접근 양식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끔씩 제자훈련을 강조하는 교회들을 살펴보면 ‘양육’을 강조하면서 ‘전도’에 등한히 경우가 있고, 반대로 ‘전도’를 강조하면서도 ‘양육’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전도와 양육, 그리고 앞서 말한 멀티미디어적 방법 등이 제아무리 잘 프로그래밍 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 교회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사역을 더욱 의지하고 간구하는 ‘기도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Ⅳ. 효과적인 팀 사역

21세기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성’을 들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조금씩 할 수 있는 팔방미인보다는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해내는 전문성 있는 리더십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목회현장 속에서 다양한 필요(needs)들을 창출해내고 전문화와 차별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주님은 이런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주도하고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 지상명령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탁월하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의 틀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팀 사역’이다.

팀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왔지만, 그 효과 면에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팀 사역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는데서 기인한다.

사도바울은 서신서에서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믿는 자는 누구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2:13). 성도는 서로 지체로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각각의 지체는 다양한 은사와 소명을 가지고 있다. 지체간에는 신분상의 차이가 없으며, 서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들이 각각의 역할을 잘 감당해주고 지체들끼리 상호사역이 이루어질 때 몸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다할 수 있다. 이것이 팀 사역의 본질이다.

1. 무엇이 팀인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였다 해서 ‘팀(Team)’이라 말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는 변화나 갱신도 없이 탈진할 정도로 바쁘게 일하는 그룹을 모두 ‘팀’이라 지칭해왔다.

‘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로저 엘로드(Roger Elrod)는 ‘팀이란 그룹이 과업, 과정, 그리고 사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엮어져 의도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힘쓰는 것’이라 했다.

첫 번째는 ‘과업’이다. 팀에는 그룹이 존재하는 과업 즉 사명(Mission)이 있다. 사명이 없다면 팀이라 말할 수 없다. 팀원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사명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한 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그 사명이 성취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비전(Vision)이다.

두 번째는 ‘과정(Process)’이다. 과정이란 팀이 그들의 목적을 추구해 가는 방법과 전략을 의미한다. 비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며 작은 단계들을 거쳐나가면서 축적된 결과들로 이루어진다. 과정이 없는 비전은 마치 말없는 마차에 불과하다.

각 단계마다의 독특한 결과들을 성취해가기 위해서는 보다 의도적이며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지체들에 대한 훈련과 지도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팀이 효과적으로 세워지든지, 탈진하든지 하게 된다.

세 번째는 ‘사람(Human)’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분명한 과업(사명)이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시키는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역의 중요한 도구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2. 효과적인 팀의 특성

그렇다면, 효과적인 팀의 운용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주요 특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팻 맥밀란에 의하면, 높은 성취도를 가진 팀에게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특성이 있다.

1) 공동의 목표 : 협동을 해야 하는 이유

이것은 팀의 초석이다. 좋은 팀은 확고한 사명과 사역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팀이라면 당연히 지체들이 함께 인식하는 공동의 사명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표류하게 된다. 팀의 사명은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팀웍’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팀웍은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때때로 팀웍 만을 강조하다가 사명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 팀의 모든 지체들이 목적과 목표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 팀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효과적인 팀 사역을 하기 원한다면,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 만약 팀의 지체들이 팀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팀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히 하는 ‘웍샵’을 할 필요가 있다.

2) 특유의 임무 : 협동을 위한 전략

일을 분담하는 것은 팀의 지체인 개인들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 장점에 맞는 요소들을 다시 짜 맞추는 것이다. 지체들의 특성에 따라 사역이 분배되고 협력을 하게 될 때 팀은 의미있게 된다. 로자베스 모스 칸터 (Rosabeth Moss Kanter)는 효과적인 팀 사역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아름다운 연주를 하기 위해 연주자들은 자신의 기술과 책임에 집중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하고, 서로 함께 연주를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파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이해해야만 한다.”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팀에 속한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각각의 책임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면 팀은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3) 안정된 지도력 : 협동에 적합한 구조

모든 팀원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리더십을 제공하는 것이 팀 사역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책임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고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효과적인 팀 사역과는 거리가 먼 이상적인 생각이다. 효과적인 팀은 확실하고 체계적이고 강한 지도력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강한 지도력이라는 것은 단지 많은 권한을 가지고 휘두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주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지체들의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

목회현장에서 팀 사역을 할 때, 지체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지도력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변화된 인격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에 언급되는 교회 지도자들의 자격 요건을 살펴보면 모두가 인격과 관련된 안정된 지도력이다.

4) 효율적인 계획과 방법들 : 협동하는 과정

목표와 사명이 ‘무엇을’ 그리고 ‘왜’에 관련된 반면, 여기서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성취해 낼 수 있을까? 팀의 기본적인 구조는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결정들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결해 갈 것인가? 여기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효율적인 계획과 방법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5) 견고한 상호관계 : 협동을 위한 풍토

팀 사역의 핵심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팀 안에서 우리는 종종 갈등을 겪게 된다. 갈등이 없는 팀은 없다. 어떤 팀이든지 간에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팀이 강화될 수도 있고 붕괴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갈등의 본질에 접근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핵심을 피해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이려는 잘못을 범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지도자와 지체들간의 신뢰를 무너뜨리게 된다. 갈등을 일으킨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는 견고한 상호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고백과 회개, 화해를 통한 갈등의 해결은 팀과 지체들을 변화시킨다

견고하고 안정된 팀을 이루려면 지체들이 소속감을 가지고 같은 배를 탔다는 운명적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의사결정의 과정에 참여시킴으로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지체들이 팀이 갖고 있는 목표를 이루는데 한 몫을 쥐고 있으므로 모두가 토의하는 과정이나 결정하는 과정, 헌신하며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6) 원활한 의사소통 : 협동의 가치

이것은 능력있는 팀의 모든 특징 속에 스며있는 요소이다. 대화는 협동의 방법을 제공하며 팀을 하나로 묶어주는 아교풀이다. 원활한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역할을 조정하고 세부적인 것을 명백하게 해주고 분쟁을 해결함으로 조화를 이루는 팀을 형성하게 된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듣는 것이 필요하다. 오해가 없는 의사소통이 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적인 경청을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져야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눈 높이에 맞추어 서서 잘 듣고 진단할 수 있는 태도는 원활한 의사소통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3. 팀 사역의 축복

사회도 그렇지만 목회 현장에서 팀 사역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이다. 이러한 것들이 추구하는 가치적 척도는 협동보다는 경쟁을, 진리보다는 승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런 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도자는 팀을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직을 이용할 뿐이다.

그러나 준비된 평신도들을 사역에 동참시키게 되면, 목회자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사역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섬기게 될 때 큰 시너지(Synergy) 효과를 얻게 된다.

교회를 몸으로 비유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귀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인체가 그저 손과 팔과 다리, 발과 머리와 위장과 심장을 단순히 한데 모아 놓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란 각각의 지체들이 함께 작용할 수 있도록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양손을 다 쓰면 각각 손 하나씩만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두 귀를 함께 사용하면 소리의 방향을 구별할 수 있지만 한쪽 귀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몸의 각 지체가 따로따로 사용될 때보다 몸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었을 때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은사에 따라 함께 사역해나갈 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팀 사역은 각자가 따로 따로 사역 할 때 얻을 수 없는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은혜의 통로이다.

Ⅴ. 인간성 회복을 위한 훈련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네 가지의 당면한 위기에 처해 있다.

첫째, 경제적 풍요 속에서 신앙의 안일주의가 편만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까?’ 하는 평안을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 이것은 외국의 교회나 서구 교회가 이미 밟아 온 전철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쉬운 믿음(Easy Believism)’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 가운데는 ‘쉽게 목회하자, 힘들여 가며 고생하면서 어리석게 십자가를 질 필요가 뭐 있나?’ 하는 등의 생각으로 성령의 강권하심을 무시하며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쉽게 되는 것은 없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멍에를 맨 주님의 일꾼이다. 가난할 때도 유혹이 있지만 풍요로울 때 오는 유혹은 더 크다. 때문에 풍요로운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더욱 크다.

둘째, 도덕적 무감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늘 신비스러움이 있다. 동시에 신령하고 거룩한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실제적인 열매들도 있다. 그것은 거의가 다 윤리적인 것들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과 교회 안의 윤리는 자꾸만 세상적인 상식이하로 떨어져 가고 있다. 거듭나고 성결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윤리 이상의 것을, 도덕 이상의 것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의 향기가 드러나게 될 줄로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생활의 성숙, 인격의 성숙, 그리고 영적인 생활에도 성숙의 훈련이 필요하다.

셋째, 문화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다. 한국 교회는 영적인 성장과 전도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하워드 슈나이더 박사는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도 성결해야 되지만 지역 사회와 세상에서도 사회적 성결을 책임지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또 모든 문화가 빛을 받아서 복음화되고 변혁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 강조하며 사회적 성결과 지역과 문화의 성결에 대해 역설했다. 참으로 귀담아 들어야할 대목이다.

넷째,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사람들이 성공하면 할수록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기도취’라는 질병이다. 나의 자랑, 나의 성공, 나의 실적을 늘어 놓다보면 그 속에선 ‘예수’가 빠져버리고 만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랑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없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보다 다른 것을 자랑하면 그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육적인 자랑에 빠지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축복을 받아서 돈이 많이 생기면,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잘 써야 하며, 축복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거나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의 형제를 사랑하는 데 있지 아니하면 그 복은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재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자가 써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 빼앗는 것이라고 까지 경고했다.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철학’이기도 하다.

1. 교육과 훈련의 중요성

흔히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는 교육개혁이 혁명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는 교육의 변화 없이 민족이나 국가가 선진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교육 개혁처럼 이제 한국 교회도 교육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

목회 사역에는 선교적 사명, 말씀 선포의 사명, 예배 인도의 사명, 성도의 질적 향상 위한 사역 등 여러 사역이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하셨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 가운데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라고 하셨다.

가르치지 않는 교회, 배우지 않는 신앙은 미신적 신앙에 빠지기 쉽다. 길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만 달린다고 잘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승용차에 훌륭한 운전 기술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길을 모르면 다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출발 전에 지도를 놓고, 목적지까지 가야 할 길에 대해 연구하고 잘 살핀 다음에야 그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다.

하루아침에 ‘번쩍’ 하는 기적을 체험했다 해서 그 사람이 위대한 일군이 될 수 없으며, 몇 주간 금식기도를 드렸다 해서 좋은 사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바울의 아라비아 광야 3년, 제자들의 3년 반의 훈련 등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교육과 훈련이 없는 사역은 성숙과 진보를 이루지 못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 내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해산된 말씀만이 창의적인 결과를 낳는다.

2. 21세기 인간들의 현 주소

21세기는 첨단 과학이 주도하는 시대이다.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을 로봇이나 컴퓨터가 대신하는 시대이다. ‘과학화’라는 말은 ‘합리화’라는 말과도 통한다. 분명한 실험과 결과를 통계적으로 정리하여 진리가 입증되는 세계가 이른바 과학의 세계이다.

이쯤 되자, 시대의 흐름 역시도 시험관에 집어넣을 수 없는 인간성이나 영성에 대한 관심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가 되고 합리적으로 입증되는 것만이 진리가 된다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1) 뒷전으로 밀려난 영혼 : 이러다간 결국 영이 없는 인간, 정신이 없는 기술자만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 첨단 과학의 맹점은 실험에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로 인정된다는 데 있다. 실험할 수 없거나 입증할 수 없는 신앙이나 영적인 문제는 아예 도외시된다는 뜻이다. 지금의 방송 매체들을 보라. 벌써부터 정상적인 신앙마저도 ‘미신’으로 곡해되는 일들을 수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21세기에 직면한 모든 인간들의 문제요 바로 이런! 이들을 상대로 사역을 해야 되는 것이 ‘21세기형 교회’이다.

2) 개인주의 개성시대 : 거기에다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화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경제적인 풍요가 증가하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가정을 꾸렸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혼자서도 자기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고, 부부간이나 세대간의 높은 장벽들이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삶을 살겠다’는 의식으로 팽배해지고 있다.

고립과 분열, 그리고 개성을 중시하는 독불장군 식의 인간성이 개개인의 의식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나’를 잃어버린 인간, ‘우리’는 없고 오직 ‘나’만 있는 인간, 그래서 함께 하는 사람들은 있으나 진정한 ‘이웃’이 없는 인간들이 돼가고 있다. 그러다가 잠언 17장 19절의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는 말씀처럼 언젠가는 자멸하게 될 불쌍한 인간이 될 것이다. 너와는 전혀 다른 나만의 삶이 있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을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할 의무감도 없는, 오직 나 혼자만이 누릴 나만의 삶이 있다는 생각이 굳어져 점차 우리의 인생은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3) 현실 만족만을 추구하는 인간 : 과학화나 합리화로 인해 인간의 영성이나 정신적 세계는 무시되고 점차 보이는 물질의 세계만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삶이 점점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편리하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다. ‘어떻게 삶을 즐길 수 있느냐?’ 만이 삶의 질을 높이는 척도가 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물건을 소비하는 것보다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어떻게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삶을 즐길 것이냐?’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육체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찾아 혈안이 되게 한다. 이런 삶은 결국 하나님 없는,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눈으로 보아 좋고, 입에 좋고, 손으로 만져서 기분 좋고, 몸에 부딪혀 좋은 오감(五感)이 즐거우면 된다는 식이다. 그래서 이 오감이 즐거운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였는데, 쾌락만을 추구하다 보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할 영성을 상실함으로써, 인간이 완전히 육체로 전락되고 말았다.

바로 그들이 우리의 사역 대상이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 돌보느냐가 우리가 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4)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고. 야고보서 1장 17절에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는 ‘변함이 없으시다’는 불변성이다. 이렇게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세우신 섭리에도 변함이 없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나 상황에서도 인간 구원의 계획만은 바꾸시지 않고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에 헌신하는 사역이 있는 한 문화나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회복되는 구원의 역사는 살아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의 일군들을 사역자로 부르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는 도구가 되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의 일군들은 이 신령한 사역을 위하여 늘 힘써야 한다.

3. 새 신자 돌봄의 방향성

1) 인간성 회복에 역점을 두는 사역 :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주셨던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로 인해 속이 텅 빈 육체적인 관계가 된 것이 문제라고 볼 때, 인간성 회복이 중요한 목회 전략이 되어야 한다.

김영일 박사는 “21세기의 신학 교육은 산업화, 세속화, 합리화 과학 기술로 인하여 손실된 인간성 회복과 초월적인 하나님을 수락하고 평화스럽고 건전한 지구 공동체를 설립하는 데 주력하여야 한다”면서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관심과 화해를 통해 관계성을 회복, 강화하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목회적 치유를 언급했다.

과학 만능과 물질 만능으로 냉혈 동물이 돼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한 책임적 자아를 갖게 함으로써 그들 안에 생명의 따뜻한 피가 흐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2)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사역 : 교회야말로 세상 끝날까지 새로운 사회에 대항하는 유일한 공동체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혹자의 말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밖에 없는 존재, 남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부부마저 남남으로 갈라져 사는 시대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가족같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존속해야 할 종말적인 공동체이다. 교회의 사이즈가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은 가족 공동체와 같은 유기적 소통이 늘 살아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영성 회복에 중점을 두는 사역 : 시어트리 박사는 “교회는 신령해야 한다. 따스한 영역은 교회의 복리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라고 하였다. 즉 영적인 교회만이 소속된 성도들에게 활기를 주는 힘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영적인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복음 전체가 뜨겁게 끊임없이 강단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인간의 영혼은 기갈의 차이에 있다. 인간의 영혼은 말씀과 젖과 신령한 음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을 위하여 신령한 자양분의 좋은 말씀이 강단에서 계속 흘러나와야 한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육체적인 정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으로 이루어지는 감격적인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고, 곳곳에서 무릎을 꿇는 기도의 열기가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도록 영적 활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Ⅵ. 21세기 선교와 목회

21세기를 진단하는 이론 가운데, ‘기능적 대행물의 발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점점 게을러지고 퇴화되어져서 여러 가지 면에서 역기능적인 부작용들이 속출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모이고, 훈련하고, 파송하는 생활’ 보다는 약식과 형식이 어우러지는 이른바 ‘인스탄트식 예배(?)’가 유행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선교 공동체라는 점이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선교가 있고 선교가 있는 곳에는 교회가 있다. D. L 무디는 “불은 타기 때문에 불이고 교회는 복음을 ? 徨球퓐?교회가 된다” 라고 말했다. 불은 타지 않으면 불이 아니고 교회는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회 현장은 아직도 선교에 대한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혹자는 “전도의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선교까지 할 수 있겠느냐?”, “우리 나라도 아직 복음 전할 곳이 많은데 구태여 돈 들여서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한다. 한마디로 선교란 사치스런 얘기라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란 같은 말이다. 다만 협의의 개념이냐, 광의의 개념이냐의 차이 일 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우선 순위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하다면 똑같이 중요할 뿐이다. 교회가 전도를 강조한 만큼 똑같이 선교도 강조해야 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원문(헬라원본)의 의미는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이, 동시에 강조된 표현이지 우선 순위의 표현이 결코 아니다.

1. 선교 목회의 중요성

데이빗 보쉬는 “선교의 신학적 이해” 라는 소고에서, 전도와 선교의 차이점을 지리적 구분과 신학적 구분으로 설명한다. 간단히 도식해 보면 다음과 같다.(책,「세계를 향한 증거」)

  지리적 구분
신학적 구분
선 교
먼 이방나라(타문화권) 아직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자들(not-yet-Christians)
;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지역
전 도
가까운 주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no-more-Christians)
; 복음은 들어갔지만 받아들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자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

보쉬는 “선교는 경계선을 넘는 것이다”라 했다. 그러니까 문화적, 사회적, 지리적으로 경계를 넘는 것을 말한다.

복음은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계선 너머에 있는 세상의 모든 족속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만든 국가도 다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 사람이 왕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수상이 되어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었으며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그들이 세상의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세계관이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는 이른바 ‘세계화’와 ‘보편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든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품어야 한다. 그곳이 힌두권이든, 불교권이든, 회교권이든 상관없다. 기독교의 최대 가치는 인간이 만들고 쌓아놓은 모든 인위적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 땅의 모든 열방과 족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상부상조의 생활을 추구하는 데 있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오직 선교’로서 만 이룩될 수 있다.

2. 선교적 위치에서의 한국교회

선교는 한국교회의 최대 명제이다. 그 동안 국력의 신장과 교세확장에 따라 한국교회 선교는 외견상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한국 선교사의 숫자를 처음 조사했던 79년, 세계에 파송된 한국선교사수는 93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전세계 1백38개국에 4천5백 여명이 파송 된 ‘세계 5위’의 선교 대국이 되었다. 이는 공식적인 숫자이고 개인 자격으로 나가있는 비공식 선교사를 합칠 경우 숫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세계 교회는 이제 한국교회의 참여와 도움 없이는 세계선교 전략을 논의하기가 힘든 상황이 되었다.

IMF 이후 선교 열풍이 위축된 게 사실이지만, 가까운 수 년 내에 2천명의 해외선교사들을 파송한다는 거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교회까지 생겼다. 선교 전략도 다양화되어서, 이제는 ‘미전도 종족 입양운동’(AAPM : Adopt A People Movement)이 한국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했고, 1만 1천여 ‘미전도 종족’을 복음화시키는 전략이 여러 교회와 선교단체들을 중심으로 수립, 진행되고 있다. 또한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들에 대한 관심도 확산 기로에 있다. 선교학적으로 “창의적 접근지역”으로 일컬어지는! 선교접근 제한지역에 한국의 전문인 선교사들이 속속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선교는 앞으로 많은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선교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른바 기존의 “보내는 선교”외에 “관리하는 선교”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선교 정책과 전략 등이 교회와 선교단체들을 중심으로 더욱 활발하게 촉진되어야 할 시점에서 지금 한국교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IMF 한파’가 터진 이후로 한국교회의 선교가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악한 환경이 선교의 열정을 더욱 가열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운 계획마저도 축소 내지는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위기중의 위기이다.

지금은 이미 21세기이다. 20세기말까지는 ‘구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대 강국이 세계를 움직여 왔다. 그러나 소련은 무너졌고, 미국도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다음 세기는 ‘환태평양 시대’로 아시아권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벌써부터 예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극동에 있는 ‘일본’, ‘중국’, ‘한국’이 그 중심 국가가 될 전망이다. 정치적, 경제적인 위치는 차치 하고라도 선교적인 위치에서의 한국과 한국교회의 위상을 생각해 보라, 선교의 중심 국가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나라가 한국 외에 어느 나라인가? 중국은 복음이 확산되는 추세에 있긴 하지만 아직은 신학적, 재원적 기반이 약하다. 그리고 일본은 모든 점에서 그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3. 한국교회 선교의 문제점

한국의 선교 특징은 한국교회의 모습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급격한 성장의 이면에 노출된 질적인 성숙이 문제였다. 너나없이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보자는 식의 ‘경쟁적 선교’ 그리고 ‘선교신학의 부재’, ‘선교경험부족’, ‘협력사역의 갈등’, ‘배타적 선교 활동’, ‘독선적인 태도’ 등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한국교회는 이른바 ‘돈 선교’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선교사의 자질 문제라든지 현지에서의 마찰 문제 등은 이미 그 도가 지나쳐 선교의 역기능적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다.

다음은 한국교회의 제2의 도약과 효과적 선교를 위해 요구되고 있는 방안들이다.

첫째, 선교사의 소명, 자질, 훈련, 파송 등에 있어서 ‘교회와 교단’, ‘교회와 교회’, ‘교회와 선교단체’간의 협력증진에 힘써야 한다.

둘째, 복음전파가 힘든 ‘미전도 종족’(Unreached People)이 거주하는 ‘창의적인 접근지역’을 우선적 선교대상지로 선정해야 한다. 이는 선교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셋째, ‘정문’을 닫아걸고 ‘후문’을 통해서만이 복음전파가 가능한 대부분의 미전도 지역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선교사보다는 전문인선교사를 양성, 파송하는 일이 시급하다.

4. 교회와 선교단체의 협력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는 기능적인 면에서는 서로 성격을 달리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교회이다. 다만 ‘지역교회(Community Church / Local Church)’와 ‘돕는 교회(Para-church)’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동역으로서의 상호 교류(Co-operation)이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해 두 기관이 하나로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져야 한다. 양자간 좋은 점들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름과 물처럼 겉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큰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단체들이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수립하고 인력 파송 계획을 가질 수 있도록 후원 동역자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하고, 선교단체는 교회가 위임한 유능한 전문인을 양성, 훈련해서 교회가 효과적으로 선교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첫째, 교회 구성원 각자가 선교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선교단체는 이질 그룹이 아니고, ‘동역자(Co-worker)’라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선교단체와 전략을 함께 수립한다.

넷째, 선교단체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다섯째, 작은 교회도 선교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선교단체는,

첫째, 구성원 각자는 지역교회에 소속하고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야 한다.

둘째, 지역교회에 선교 사역의 전문적 지식과 체계를 지원한다.

셋째, 교회 내 선교위원회 사역에 참여함으로 지역교회와 효과적인 동역관계를 유지한다.넷째, 사역에 관한 모든 진행과정이 지역교회에 알려져야 한다.

5. 사도 바울의 선교 목회

선교 목회적 입장에서 성서적 선교의 대표적 주자는 역시 ‘바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선교행전’이라고 말하는 사도행전을 보면, 전반부 1장에서 12장까지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베드로 사역’과 후반부 13장에서 28장까지의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 사역’으로 대별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의 선교 목회는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선교의 방향과 자질을 논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되고 있다. 몇 가지 바울선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그의 선교동기는 ‘성령의 부르심’ 이었다(행13:3, 참고-행9:15, 26:17).

둘째, 이방선교에 대한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었다(행20:24).

셋째,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사역이었다(행28:31).

넷째, 이적과 능력이 나타난 사역이었다(참고-고후12:12, 고전4:20)

다섯째, 복음의 효과적인 접근을 위해 융통성이 있는 사역을 하였다(참고-고전9:19-22)

여섯째, 모 교회를 중심한 선교를 했다. 3차에 걸친 그의 선교여행은 반드시 안디옥교회에서 출발하였고(행13:4, 15:40, 18:22), 안디옥교회에 선교보고를 하였으며(행14:26-27, 18:23), 안디옥교회에서 안식년을 보냈다(행14:28).

일곱째, 일행과 같이 한 협력사역이었다(행13:4, 행15:40).

여덟째, 개척사역을 했으며 그 교회들이 자립 할 수 있도록 육성했다(행11:29, 20:35).

아홉째,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땅 끝(로마)까지 기어이 갔다(행20:23).

Ⅶ. 마치는 글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의 인간 역사 한 복판에서 시대 시대마다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키셨다. 기독교적 영적 각성 운동이란, 본래 영적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범죄, 타락하여 ‘육체’로 전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성이 소생 회복되어 하나님과의 관계 및 인간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본래적 삶을 살게 하는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시대마다 일어났던 영적 각성 운동들은 개개인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일반의 광범위한 삶의 영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을 발견한다. 특히 우리 나라에는 1907년 길선주 목사 등에 의해서 일어난 ‘부흥 운동’이 있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말씀을 경청하며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렀을 때, 상상할 수 없었던 성령의 역동적인 불길이 온 강산을 메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임했다.

당시 상황을 지켜보았던 블레어(Blair) 선교사는 “그들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무능한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와 같은 비참하고 무능하고 깨어진 조선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강하게 임했던 것이었다. 도무지 기대할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축복이 하늘로부터 임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극단적인 신비현상이 수반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감동에 못 이겨 마루 바닥에 뒹굴고, 가슴을 치며 죄를 자복하는 통회가 있었다. 미움과 시기로 가득 찼던 신자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기쁨과 겸손으로 채워지는 영적 변화가 수반된 운동이었다.

곳곳에서 구습을 개혁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등 기독교적 사회 문화를 토착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은 ‘제 2의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

한국 교회는 백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괄목할만한 발전과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과 세계를 향한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감당할 만한 저력도 갖추게 되었다. 사실 한국 사회와 세계 교회는 한국 교회가 선교와 봉사 사역을 감당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거기에다 남북 통일의 민족적 과업을 앞둔 한국 교회에 주어진 사명은 참으로 막중하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는 자체 성장과 자기 성취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개교회주의와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어느덧 교회의 저력을 의지하게 되었고, 섬기려는 자세 대신 주장하려는 자세만을 지니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신뢰를 상실해가고 있으며,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가 교회로서의 참 모습을 되찾고 교회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적 각성운동과 부흥을 다시 한번 경험해야만 한다. 영적 각성운동이 다시 새롭게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더구나 모든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21세기의 암울한 미래를 전망해볼 때, 지금부터 그 마음을 저미지 않으면 그 땐 영영 그 기회마저도 하나님께서 하락치 않으실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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